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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커피믹스’

  • 솔뫼학교
  • 노병윤 문해교사 인터뷰
내가 막 진흥원에 입사한 무렵 “먼저 노병윤 선생님을 만나보세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 머리 속에는 노.병.윤. 이름 석 자가 콕 박혔다. 2020년 가을 성사되지 못한 만남은 해를 넘기고서야 조우가 이루어졌다. 제천솔뫼학교 노병윤 선생님은 충북의 문해교사를 넘어 대한민국의 문해교사다. 그녀를 존경하는 이도, 그녀를 닮고 싶어 하는 이도 많다. 나는 궁금했다. 노병윤 선생님은 ‘어쩌다’ 이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에 대해........ 미처 2020년 티를 벗지 못한 지난 2월, 제천솔뫼학교로 향했다.

“다녀오셨어요?”
제천 솔뫼학교 인사는 독특하다. 신발을 벗고 주섬주섬 들어오는 학습자에게 다녀오셨냐고 묻는다. 방문하는 이들에게 집과 같은 편안한 공간이 되라는 의미에서 주체를 바꾸었다. 한 마디 바꾸었을 뿐인데 객客의 의식은 확장된다. 원래 있어야 할 곳에 다시 돌아왔다는 안도감이랄까, 솔뫼학교 학습자들은 매일 이러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솔뫼학교 김종천교장과 노병윤교사의 만남은 약 20년 전,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년, 19년 쯤 전 노병윤 문해교사는 유아복 브렌드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노병윤 문해교사의 ‘과거’가 궁금했는데 유아복 대리점 사장이었다니! 의외의 이력에 놀란 내게 노병윤 문해교사는 부연 설명을 곁들인다.

“그때는 마음만 부자라 알뜰하게 살아야했어요. 알뜰하게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우리 애들에게 브랜드 옷을 입혀주고 싶더라고요. 셋째를 낳자마자 유아복 대리점을 시작했죠. 브랜드 옷 많이 입혔냐고요? 많이 입혔죠. 팔리지 않는 옷과 이월상품 위주로요(웃음).”

그러던 중 친한 지인이 강의를 같이 들으러 가자고 하여 따라나선 게 운명의 시작이었다. 직원이 많은 꽤 큰 규모의 건강식품 대리점에서 열리는 인문학 강의였다. 그때 인문학 강사로 강단에 섰던 분이 바로 지금의 솔뫼학교 김종천 교장이다.

“글을 모르는 어른들이 있대요. 공부를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어요.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우리 아이도 아는데? 그 강의가, 첫 만남이 꽤 강렬하게 남았던 거예요.”

그렇게 인연이 되어 김종천 교장이 아동복 대리점에 들리기도 하며 안면을 텄다. “교장선생님이 하도 학교에 오라고 해서 와봤는데, 딱 지금 이 자리였어요. 테이블도 너무 지저분하고, 책꽂이도 막 이상하고. 그때 얻어 마신 커피믹스 한 잔이 지금까지 왔네. 그때는 자율문구대가 있었는데 노트랑 지우개, 연필, 저금통이 있더라고. 저게 뭐냐고 교장선생님한테 물으니 어머님들이 문구류를 여기서 구매할 수 있게 꾸려 놓은 거래요. 어머님들이 문구점에 가서 아이들이 쓰는 로봇이나 인형이 그려진 노트를 사야하는데 그걸 두려워하시는 거야. 한글을 배우러 다니는 것을 들킬까봐”

노병윤 문해교사 마음을 끌었던 장면이 있다. 40대 초반 학습자 두 분이 교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나와서는 노병윤 문해교사에게 커피를 타주었다. “표정이 되게 밝았어요. 저렇게 젊고 예쁜 분들도 공부를 못해서 지금에야 공부를 한다고? 저 분들을 위해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을까? 그러면서 시작이 된 거죠.” 20년 전 맑은 표정으로 커피를 타주신 학습자는 현재 영월분교 교장이 되셨다.

처음부터 교수자로 시작한 건 아니었다. 소식지 만드는 것부터 조금씩 했다. 아기자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시안 따라 그리기도 하며 소식지를 제작했다. 소식지는 한 달에 한 번 발간되었고, 노병윤 문해교사는 한 달에 서 너 번 솔뫼학교를 찾았다. 그러나 누군가를 가르치는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선뜻 수업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낮에 전화가 온 거예요. 교장 선생님이예요. 빨리 학교로 나와 보래요. 급한 일인가 보다, 걱정 되서 택시타고 막 달려왔는데 여기로 들어오라는 거예요.”

창문도 없는 작은 교실에는 학습자 7명이 앉아있었다. 교장선생님은 학습자들에게 노병윤 문해교사를 소개했다. “지금부터 여러분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입니다.” 양갈래 머리를 땋고 모자를 쓴 여인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선생님’이 되었다.

“그 때 커피믹스 드신 거 후회하지 않으세요?” 우스갯소리로 물은 내 질문에 후회한 순간 없었다고 노병윤 문해교사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학습자들이 무심코 내뱉는 말에 상처 받을 때는 있었지만 이 일 자체를 후회한 적 없다고. 노병윤 문해교사는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해 왔다. 그 시간이 벌써 37년이다. 지역 장애인 시설을 찾아가서 청소해주고 아이들 씻겨주고 화장실 청소를 해주었다. 독거노인 대신 시장을 봐주거나 병원에 모시고 갈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솔뫼학교 자원봉사자들을 보면서 이 분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교육봉사’라는 열정에 불이 붙었다. “나보다 청소 잘 하고 나보다 콩밭 잘 매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내가 아니라도 그런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엄청 많잖아요. 그런데 여기만큼은 내가 지켜내겠다. 교장선생님이 굉장히 애를 쓰고 계셨을 때고 여기는 내가 필요한 곳이라는 걸 알았어요.”

일에 집중하기 위해 아동복 대리점을 정리했다. 딱 10년만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른 길을 찾자하고 시작한 게 어느 덧 20년이다. 새로운 길에 대한 도전의식은 공부에 대한 열망으로 옮겨 붙었다. 그동안 실천하지 못했던, 미루어뒀던 공부도 시작했다. 쉬지 않고 달린 공부 역시 꼬박 10년이 걸렸다. 아이들도 있는데 어떻게 병행했냐는 내 질문에 집에 있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 해줘야 일을 할 수 있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다른 건 몰라도 매일 아침 가족을 위해 아침밥상을 차리자. 그렇게 결심하고 행한지 10년이 지났어요.”

1년도 아니고 3년도 아니고 10년. 노병윤 문해교사의 성격이 묻어난다. 그녀는 말한다. 10년이 무척 긴 시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고.

예전에 봉사활동을 다녔을 때 장애인 아이들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또 어느 날은 한쪽 몸 마비가 온 독거노인을 모시고 침을 맞으러 가기 위해 택시를 타야했는데 택시가 승차거부를 한 일도 있었다. 여기는 타인을 원망해야하는 그런 아픔은 없다. 다만 속에 멍이 든 채로 사는 분들이 많을 뿐. 학습자의 투박한 행동과 말 역시 그 분들만의 표현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장애는 도와주는 데 한계가 있어서 마음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여기는 그 아픔들이 치유가 되더라고요. 점점 피멍이 옅어지면서......”

문해교사 안 했으면 뭘 하셨을 것 같아요?

문해는 문제를 해결하는 교육이라고 노병윤 문해교사는 말한다. 문제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문해가 문자해득이라는 기초교육이 아니라 서로의 문제를 해결하고 서로를 도와서 힘이 되는 그런 마을, ‘문해마을’을 만들고 싶은 게 꿈이다. 인간은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는 존재이지만 문해 안에서는 인간 자체의 존중이 남아있고 서로를 귀하게 여길 줄 알며, 죽음까지도 초월할 수 있는 마을공동체를 꿈꾼다.

나는 묻는다.

“문해교사 안 했으면 뭘 하셨을 것 같아요?”

“어떻게든 하지 않았을까?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글쎄......사람복도 있고 일복도 많으니까 아마도 관련된 무언가를 했겠죠. 어떻게든. 글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어쩌면 돈을 더 많이 벌어서 문해 공간을 만들었을 수도 있겠네요.”
“기승전 문해로 이어지네요.”
이쯤 되면 20년 전 노병윤 문해교사를 기웃거리게 하다가 어느 새 두 발 모두 담그게 한 김종천 교장의 마력이 궁금하다.

2018년도 스승의 날을 맞아 청와대 오찬 초대를 받았다. 전국문해·기초협의회 소속 2명만 갈 수 있는 자리인지라 많은 고민을 필요로 했다. 학습자이면서 교수자인 사람이 상징적이리라 판단했다. 그 중 한 명이 영월분교 교장이 된 학습자였고 주변 사람들을 설득한 끝에 한 명으로 선정됐다. 이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당시 선배로 후배들을 지도하던 도우미교사 학습자에게 노병윤 문해교사는 전화를 했다.

“어머님, 어디세요? 어머님, 청와대 한 번 가보실래요?”
“청와대가 어디예요?”
“대통령님이 사시는데요.”
“가지요, 뭐.”
“너무 쉽게 ‘가지요’ 하시는데요?”
“선생님이 가자고 하니 가야죠.”
“어머님 혼자 가셔야 해요.”
“그럼 나 안 가요.”

주변 사람 설득이 끝인 줄 알았더니 다음 관문이 남아있었다. 상징성도 있고, 대통령님과 밥을 먹는 자리는 굉장한 영광이라며 설득을 막 했더니 남편이랑 상의를 해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그 집 자식들이 난리가 났더랬다. 그렇게 청와대 오찬에 무사히 다녀오셨고 “컴퓨터에 쓰는 거래요.”하며 기념품으로 받은 USB를 노병윤 문해교사에게 선물로 주었다. “시계는 못 줘요.”라는 말과 함께. 원래 이 학습자는 두 개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분교를 내서 선생님을 하는 것, 하나는 문해교육 홍보를 위해 인간극장에 출연하는 것. 영월분교 교장이 되었으니 꿈을 하나 이루었다.

이렇게 뒤따라오던 분들이 이젠 나란히 걷는 모습들을 보며, 이 일이 학습자의 꿈을 실현시켜주는 희망이라는 것을 다시금 상기한다.

지역에서도 문해교육 관련 상담 혹은 자문을 구하러 많이들 찾아온다. 그 지역의 교사될 만한 분들 교육을 시켜 문해교사로 길러내고 문해교육기관 설립에도 힘을 보탠다. 지역민들이 그 안에서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게 도와준 곳 중 솔뫼학교보다 더 커진 기관도 있다고, 그런데 그걸 잊은 것 같다며 노병윤 문해교사는 호탕하게 웃었다.
“사람들이 저한테 물어요. 박사학위나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도 그거 돈 안 받고 하냐고. 그러면
‘아직도가 아니라 남은 시간도 그렇게 할 건데’ 그렇게 답해요.”

부모가 자녀에게 남겨줘야 할 자산이 무엇일까? 여기, 한 아버지가 자식에게 남겨준 유산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큰 딸을 무척이나 아껴서 그 시골에서 흙 한 번 못 만지게 하며 자식을 키웠다. 덕분에 딸은 농부의 딸임에도 여전히 농사를 짓지 못한다. 그렇게 키운 딸에게 어느 새 노인이 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말했다.

“윤이야, 정말 미안하다. 우리 큰 딸 정말 미안하다. 내가 죽을 때가 되니 남겨줄 것이 너무 없다. 동생들을 부탁한다. 너한테 큰 짐을 지이고 가게 되서 너무 미안하다.”
그 딸은 아버지 눈을 보고 말했다.
“아부지. 남겨준 게 왜 없어? 우리 사남매가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열심히 살면서 독한 일 하지 않고 살잖아. 그것만큼 좋은 자산이 어딨어? 아부지가 잘 베풀어서 그 복을 우리가 받고 있는 거야.”

이 이야기의 주인공 ‘노병윤 아버지’는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영향인지 저도 모르게 내재되었고 그게 잘 사는 삶이라고 딸은 생각한다. 그 가치를 키워온 딸은 대한민국 대표 문해교사가 되었고 그를 좇는 후배 교사들이 많아졌다. 노병윤 문해교사는 그들에게 말한다.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일이 정말 옳다고 생각한다면 나와 같이 해요. 선택을 했으면 흔들리지 말아요. 당신도 할 수 있어요.”

노병윤 문해교사의 이야기를 듣던 중 “천직을 찾으셨네요. 운이 좋아요.”라는 내 말에 “맞아요. 운이 좋아요.” 강하게 긍정하던 그녀의 눈빛과 목소리가 떠오른다. 설령 지금 우리의 일이 천직이 아니어도 괜찮다. ‘딱 10년만 해보자.’라고 다짐했던 그녀의 20년 전과 같은 순간이 우리에게도 오지 않으리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설령 그런 순간이 존재하지 않아도 괜찮다. 천직을 찾지 않아도 단 하나 뿐인 충분히 의미 있는 인생이니까 말이다.

가끔 위안이 필요할 때 제천솔뫼학교에 가보라.

당신은 이렇게 외칠 것이니.

세상으로부터 “다녀왔습니다.”
다시 세상에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