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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던 직업을 만든 사람들
<JOB creator>

  • 충청북도평생교육진흥원
  • 박시현 전문연구원
오랜만에 강연을 하는 사람이 아닌 듣는 사람으로서 강연장에 갔습니다. 일반 시민들이 돌아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는 자리였습니다. 한 강연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장 슬픈 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 목소리가 기억이 안 난다는 점입니다. 내 이름을 불러주던 그 목소리를 아무리 되살려보려 해도 가물가물해요. 아버지 목소리가 너무 그립습니다.”

눈물을 찍어내던 그 와중에도 저는 ‘메시지 필름 제작자’로서 함께 일하고 있는 김동하 씨와 이성아 씨가 생각났습니다. 만약 저 강연자가 아버지를 떠나보낼 당시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아버지의 목소리를 영상에 담아놓을 수 있었다면, 지금 이렇게 슬퍼하지는 않을 거라는 아쉬움 때문이었죠.

김동하 씨와 이성아 씨가 처음 ‘유언 동영상’을 촬영하기 시작한 2013년, 자신들의 명함에 새긴 첫 창직명은 ‘메시지 필름 제작자’가 아니라 ‘유언 동영상 제작자’였습니다. 웰다잉이 확산되어 가는 요즘이지만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를 직업명으로 쓰는 건 시기상조였던 걸까요? 주 고객층인 어르신들의 거부 반응이 예상외로 심했다고 합니다. ‘유언 동영상’이라는 단어가 마치 죽음을 재촉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이들은 창직명을 ‘메시지 필름 제작자’로 바꾸게 되었지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뒤 기자로 활동하던 김동하 씨와 영상 제작 쪽 일을 해오던 이성아 씨는 어릴 때부터 친구로 지내오던 사이였습니다. 이성아 씨는 우연히 웰다잉 프로그램을 촬영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죠. 태어나면 누구나 반드시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장례 절차 등 격식에만 신경을 쓰고 정작 삶을 제대로 마무리하는 웰다잉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이때 새삼 깨닫게 된 겁니다.

두 사람은 웰다잉에 관심을 가지면서 관련된 책을 읽고 인터넷 자료를 살피는 등 삶과 죽음에 대한 공부를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죽음 준비 지도사’ 과정 등 웰다잉 교육 프로그램도 수소문해서 찾아다녔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 죽음의 문턱에 선 사람들을 직접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무작정 호스피스 병원과 호스피스 단체에서 봉사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500명 이상의 환자들을 만나고 전문 호스피스들, 자원 봉사자들도 만났다고 해요.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죽어가는 사람이나 그 가족들을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점점 더 방향을 잡아나가게 됩니다. 누구나 행복하게 삶을 마무리하려면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자신들이 해오던 영상 작업이 그 일에 아주 유용하다는 걸 재삼 확인하게 된 겁니다.

이들이 보여준 사진 한 장에 유독 눈길이 갔습니다. 사진 속에는 환자복을 입고 병상에 앉은 채 고개를 떨군 아빠와, 그 아빠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사진의 스토리를 듣고 저는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암환자인 아버지는 죽음을 앞두고 메시지 필름 촬영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의연하려고 노력했지만 메시지 필름 제작자가 병실에 들어선 순간, 아버지는 그만 저승사자라도 만난 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무너지고 맙니다. 제가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는 이상 그 심정은 결코 모를 것입니다. 사진 속 장면은, 곁에 있던 어린 딸아이가 울음이 터진 아버지를 안아주며 위로하던 순간을 찍은 것이라고 합니다. 많은 의뢰인들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가끔은 자신들의 등장에 와르르 무너지는 의뢰인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들이 마치 ‘저승사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씁쓸할 때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삶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졌다고 느낄 때에는 누구나 예민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 임박해서도 이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거부하기 십상입니다. 죽음 앞에 초연한 경우는 오히려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충분한 대화를 통해 의뢰인의 현재 감정 상태나 심리 상태를 파악하고 의뢰인이 안정을 찾은 후에 촬영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사람을 직접 상대하면서 하는 일이 대개 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특히 의뢰인의 심정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수용하는 능력과 자질이 필수입니다. 이런 까닭에 유언 동영상을 만드는 일은 굉장한 정신적 노동을 요합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 힘든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건 돌아가신 분과 남겨진 가족들이 다음과 같이 두고두고 마음을 교환할 수 있는 일종의 통로 같은 걸 만들어주었다는 뿌듯함 덕분이라고 합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납골당에 가서 생전에 어머니께서 남기신 메시지 필름을 꺼내어보곤 합니다. 안치함 가족 사진 옆에 놓아둔 전자 액자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면 고되고 지친 삶에 큰 위로와 새로운 힘을 얻거든요. 쉽지 않으셨을 텐데 저를 생각해 유언을 영상으로 남기신 어머니. 당신의 사랑을 생생히 느끼며 살아갑니다. 정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20살이 된 나의 아들 ○○야. 아빠다. 아마도 이 영상은 10년 후 성인이 된 너에게 보여지고 있겠지. 군 입대하는 늠름한 내 아들 등도 한 번 두들겨주고 싶고, 결혼하는 너의 모습도 보고 싶고, 옆에서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주고 싶었는데… … 아들아, 참 많이 미안하다. 비록 아빠가 너와 함께하지 못했지만 멀리서 너를 응원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다. 매순간 네가 성장하는 그 순간순간을 응원하고 축하한단다.

어린 아이들을 두고 몇 개월 후면 죽는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눈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 남은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메시지 필름’을 알게 되었고, 아이들을 위해 이 못난 엄마의 모습과 마지막 말을 영상으로 남기게 되었습니다. 영상이 아이들에게 전해질 때 저는 이미 이 세상에 없겠지만 아이들이 이 엄마의 모습을 평생 간직하며 함께해 줄 생각을 하니 그래도 마음이 한결 놓이네요.

유언 동영상은 이 같은 통로 역할 말고 또 다른 역할도 합니다. 유산 상속과 분할 등 재산과 관련한 고인의 발언은 법적 효력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유산 상속 등에 관한 유언 없이 부모가 갑작스럽게 죽음으로 인해서 자식들 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를 심심찮게 봅니다. 실제로 60대의 한 의뢰인은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행여나 재산 분배 문제로 자식들이 싸울까봐 걱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세 자녀에게 똑같이 재산을 분배해 주면 좋겠지만 상대적으로 형편이 어려운 둘째가 마음에 걸렸대요. 아픈 손가락을 치료해야 나머지 손가락들도 안 아프다는 결론을 내렸고, 둘째에게 유산을 조금 더 준다는 내용을 영상으로 남겼습니다. 그러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고 합니다. 동영상에는 아버지의 표정, 말투, 눈빛이 생생히 담겨 있기 때문에 글로만 유언을 남기는 것보다 아버지의 마음을 훨씬 잘 전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메시지 필름 제작자는 동영상 기획, 상담, 연출, 촬영, 편집 등 기술적인 역량만이 아니라, 사람의 심리와 죽음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김동하 씨와 이성아 씨는 이 같은 기술과 지식을 체계화하여 전문적인 인력을 양성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만으로는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웰다잉 문화가 더 안착되면 이들 같은 메시지 필름 제작자들이 더 필요해질 테지요.

“창직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고 새로운 노동 시장을 개척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창직 아이디어를 시장에 안착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계속하여 뒤를 이어줄 전문적인 인력 양성도 고려해야 하지요.”

두 사람은 메시지 필름 제작자로서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인식을 꾸준히 개선해 오고 있습니다. 무연고자 장례를 지원하는‘나눔과 나눔재단’을 통해 독거노인들의 메시지 필름도 만듭니다. 새로운 웰다잉 문화, 장례 문화를 위해 이들은 오늘도 땀방울을 흘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 꾼 꿈의 한 장면이 문득 생각나는군요. 컬러와 디자인이 다양하고 화려한 관棺들이 많이 있었는데, 제가 들어갈 관을 직접 고르고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요즘은 매장보다는 화장이 느는 추세죠. 꿈속대로라면 제가 죽으면 관보다는 납골함을 직접 고르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관이든 납골함이든 자신이 묻힐 데를 직접 고르는 것은 죽기 전 자신의 메시지를 남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목소리로 메시지를 남기는 것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을 그리워할 가족들에게 살아생전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본 원고는 저서 <내 직업 내가 만든다>에서 일부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