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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바꾼 한 사람 <사람학교>

인생의 좌표가 되어준 두 분의 인연

  • 제천시청
  • 김병호 평생교육사
1990년대 이전만 해도 나의 고향 강원도 삼척 도계는 우리나라 석탄 생산량의 80%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도시민 부럽지 않은 부자 동네였다. 지나가는 똥개도 1만 원짜리 하나쯤은 물고 다닌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읍내가 왕성하였더, 지금은 1만 명 정도 되는 인구가 살고 있지만 전성기에는 시내 곳곳에 탄광 광부들의 생활 터전인 사택이 즐비하게 들어서 쾌나 복잡하고 많은 인구가 살았었다.

유년시절 미술 시간에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 풍경을 그려 오라는 숙제를 선생님이 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조그만 개울이 있었는데 언제나 물빛이 새까만 색이었다. 그래서 냇물을 그리는데 온통 회색과 검은 색으로 물을 표현하여 선생님께 혼이 난적도 있었다. 나는 본 것을 그대로 그렸을 뿐인데 본의 아니게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석탄 에너지자원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곳에서 하다 보니 광부들은 매일 막장 갱도에 들어가 석탄을 생산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매월 일정한 날 쌀 배급과 간주(봉급)타는 것이 일상이었으며, 눈뜨면 3교대 근무로 갑반, 병반, 을반 출퇴근이 일상이었다. 오로지 힘든 일을 견디기 위해 그들이 술 마시고 담배피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나 또한 고등학교 시절 소위 얘기하는 열공파 친구와 그렇지 못한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놀았다. 친구들과 함께 놀 때면 담배를 피우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나는 담배만은 피우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하였던 나는 커서 담배는 피우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심이 고정관념처럼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배경은 큰집 형님 때문이었다. 큰집 형님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탄광일이며 농사일을 도맡아 했다. 큰집 형님은 그 힘든 탄광 일을 하면서도 담배만은 피우지 않았다. 어느 날 형님께 “형님은 왜 담배를 피우지 않느냐?”고 물으니 담배를 피우면 사람이 깔끔하지 않다고 하시면서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옷도 더러워지고 냄새가 나기에, 난 술은 좀 마셔도 담배는 피우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현명한 생각 중 하나가 ‘바로 나도 크면 형님처럼 담배만은 피우지 않겠다’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결심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해 불발이 되고 말았다. 입대한 논산 훈련소에서 고된 훈련 후 잠깐의 휴식 시간에 소대 전체에게 “담배 일발 장전”하면 “발사!”해야 했던 것이다. 나는 담배 연기조차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단체 행동에 동조해야만 했다. 1980년대 초에만 해도 군에서 연초대가 지급 되었던 시절이라 군 생활 하면서 담배는 피우는 것에 열외는 없었다.
그 사정에도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만 담배를 피우는 척만 했을 뿐 형님에게서 받은 교훈과 나의 굳은 결심을 잊지 않고 군 생활 30개월 동안 담배를 멀리했다.

군 제대 후 다시 형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형님은 꾸준하게 탄광일을 하면서 집안일과 농사일을 병행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근면 성실 그 자체의 형님이었다. 형님은 본성도 착하여 동생들을 잘 돌보며 아껴주시고 맛있는 것이 생길 때면 언제나 나를 불러서 함께 먹었다.

나는 형님의 영향을 받아서 내 자식들에게도 그대로 적용 시켰다. 아들만 둘인 나는 아들에게 “너희들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담배만은 피우지 않도록 해라.”라고 명령을 내렸다. 만약 담배를 피우다가 아버지한테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담배는 백해무익이니 절대 피워서는 안 된다.” 라고 세뇌 교육했다. 그 결과 두 아들은 지금까지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얼마 전 둘째 아들(30세)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 커피숍에서 아들과 아들 친구들 10여명은 커피를 마시고 나오는 길이었다. 가게 앞에서 아들 친구들 모두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만 그 중 내 아들만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또 한 번 세뇌교육의 힘을 실감했다, 그리고 아들이 고마웠다. 친구들의 유혹에도 마다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정말 잘한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아들의 아들에게도 같은 교육을 하여 우리 집안은 담배 피우는 사람이 앞으로도 한명도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내 인생에 있어서 잊지 못할 두 번째는 불혹의 나이에 만난 동향 사람이다. 그 당시 나는 입시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학원은 지역 교육청에서 관리하고 있었고 정기적으로 지역 교육청 학원 담당자의 업무지도 점검이 있었다.

학원 지도점검이라지만 사실 감사 수준이었다. 그 때 나는 입시학원을 운영했는데 건전한 학원 운영 점검을 위해 교육청 담당 계장님과 담당자가 정기적으로 지도 점검을 나왔다. 학원 서류는 별 다른 지적사항이 없었고 그 이후로도 몇 년간 교육청으로부터 꾸준한 지도 점검을 받아야 했다.

나는 입시 학원장으로서 학원 연합회 임원 등을 거치며 학원장들과 함께 스포츠 클럽인 테니스 동우회를 조직하여 주말을 통해 스포츠 활동을 하게 되었다. 때로는 다른 테니스 팀과 친선 게임 혹은 원정 게임도 했다. 테니스 회장직으로 있을 때 나는 교육청 일반직 테니스 클럽과 친선 경기를 몇 번이나 했었고 자연히 교육청 일반직 테니스 클럽 회원과 친해지게 되었다. 교육청에서 학원 관리는 교육청 일반직 공무원들이 담당했기에 행정 실장들 또한 많이 사귀게 되었다. 학원 지도 점검을 하시던 동향인 그 계장님과도 친분을 쌓게 되었다. 이후 계장님은 과장으로 승진하게 되었고 교육청 관리과장으로 부임 받아 근무하고 계셨다.

그때 나는 학원 운영을 집사람에게 맡기고 약 4년간 강원도 지역 대학교 시간 강사로 출강하고 있었다. 본가가 삼척이라서 집에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왔다가 다시 출강을 위해 삼척에 있는 집에서 머물며 대학 강의를 하였다.

오랜만에 강원도 집에서 어머니가 챙겨주시는 숙식을 하며 대학 강의하는 것이 즐거웠다. 모처럼 어머니에게 효도 한다는 느낌도 들었고 어머니 또한 강의 후 귀가하면 술안주를 준비해 놓고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곤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한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김원장님, 잘 계셔? 요즘 어떻게 지내”하시면서 안부 전화를 한 것은 다름 아닌 교육청에 근무하고 있는 과장님이었다.

과장님은 안부 인사 겸 교육청에서 이번에 평생교육사를 채용하니 김원장이 평생교육사 자격증이 있으니까 한번 지원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공무원이 되고 싶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만학도로 대학원을 졸업하고 언제나 기회가 있으면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리라 생각하고 평생교육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던 참이었다. 그 꿈이 이제야 이루어지려나 하는 생각에 잠도 제대로 못자고 서류를 준비하여 교육청 평생교육사 채용에 지원서를 제출하였다. 교육청 과장님이 정보를 주지 않았으면 평소에 교육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볼 생각조차 안했었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평생교육사 채용에 응시했고 당당히 합격하여 교육청 과장님이 계시는 곳에서 1여년을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교육청 과장님은 멘토가 되어 나에게 공직자로서의 자세와 근무요령 등을 친절히 알려 주셨다. 종종 예전 학원장으로 근무했던 때와 테니스 모임 등에 대한 이야기도 하시면서 각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공직자의 길을 안내해 주셨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 공무원이었는데 꿈을 이루고 나니 얼마나 감격스럽고 행복했던지 지금 생각하면 그 과장님이 한없이 감사하고 고맙다.

교육청에서 1년 정도 근무하고 나는 본격적으로 평생교육사의 날개를 펼치기 위해 지자체로 자리를 옮겨 지자체 평생교육사로서 평생학습을 기획하고 운영하며 시민의 행복한 삶을 위해 오늘도 초심을 잃지 않고 열심히 평생학습 정책 및 운영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내 평생 나는 평생교육만을 위해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입시학원 운영, 대학교 강사, 교육청 평생교육사, 지금은 지자체 평생교육사로 살아오면서 교육청에 근무 하셨던 그 과장님이야 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분이라고 생각한다. 그 분이 전화 한통 안 했으면 나는 아마 지금도 공무원이 아닌 대학교 강사로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현재 나는 그 고마운 과장님과 가끔 만나서 그 옛날을 회상하며 즐거운 소주 한잔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는 언제 어떻게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절대 적을 만들지 말고 늘 처음 만났을 때처럼 초심을 잃지 말라.”고 하시던 그 과장님의 말씀이 아직도 생생히 그려지며 귓가에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