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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꾼 한 사람 <사람학교>

나의 영원한 벗!

  • 어재영
  • 진천군평생학습센터
‘내 인생을 바꾼 사람’이라는 거창한 주제로 원고 의뢰를 받고, 내 인생의 전환점은 무엇이었고, 그 한 가운데 있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내 인생이 그렇게 파란만장하지 않았고 특별하지 않았는데 내 인생을 바꿀만한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존경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지도교수님을 비롯해 학교 선배, 직장 선배 등 몇몇 떠오르는 분들이 있지만, 내 인생을 바꾼 분들이었냐는 질문에는 ‘글쎄?’

그러다 떠오르는 딱 한 사람. 서 보 현!
어르신들이 억울해서 못 죽겠다고 할 정도로 편해진 세상, 의료기술이 발달한 세상에 아직도 고치지 못하는 병과 기다려주지 못하는 병이 많았다. 60도 못 채우고 그렇게 일찍 가야할 정도로 급할 게 무어란 말인가.
그와 나는 물리적 거리가 200킬로도 넘게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지만 형제보다 더 자주 통화하고, 더 자주 만나고, 만날 때마다 반갑기 그지없던 그런 사이였다.

30대 중반 직장을 접고 백수시절 인터넷 바둑을 알게 되었다. 바둑사이트 대화창에서 참 재미있게 말을 한다 싶었던 분이었다. 나이도 얼굴도 모르고, 오직 아는 것은 대화명 뿐이었지만, 매일같이 사이버공간에서 만나는 것도 정이 들었는지 궁금해지고, 만나고 싶어졌다. 나는 광주광역시, 그는 대구 가창 우륵마을.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부산이었다. 바둑사이트에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 몇몇이 만나기로 했다는데 나도 합류했다. 그리고 모임을 만들고, 오프라인 정모를 시작했다. 서울, 대구, 부산, 울산, 광주, 청주 매년 1~2회 정기모임과 번개모임. 그렇게 그와의 만남은 시작 되었다.

‘모임 구성원 중 내가 가장 젊었고, 가난했다. 그들은 4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까지. 생활은 나이에 걸맞게 안정적이었고, 바둑실력도 거의 1단 이상이었다. 여유로운 삶으로 바둑에 시간을 많이 쏟을 수 있었던 그들 중 서 보 현! 당시 내 바둑은 인터넷에서 14급이었고, 그는 9단이었다.
사실은 비겁한 행동이지만, 내가 두는 바둑방에 들어와 전화로 훈수를 해서 내가 이기도록 하기도 하고, 대화창에서 불미스럽게 싸움이 나면(나이가 많은 분들이었기에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속도가 거의 독수리였고, 싸움 상대에게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때) 전화를 해서(내가 바둑사이트 접속을 안 하고 있을 때 들어오라고) 내가 중재를 하거나 대신 싸우기도 했다.
오프라인 모임에서 바둑대회를 개최하기도 했고, 그는 모임 구성원 중 탑클라스 고수에 언변도 탁월해서 좌중을 들었다 놨다 분위기를 유쾌하게 이끌었다.
딸만 둘이었던 그는 나보다 10살이 많았지만, 큰딸이 내 아이와 동갑이었다. 그 아이들이 5, 6학년쯤 시험만 보면 올 백점이라고 그렇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나에게 자랑을 했다.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고 해도 그는 내가 누구한테 그런 말을 하겠냐며, 너한테는 편해서 얘기한단다. 늘 1등이고 중학교는 수성구(대구의 8학군)로 보낸다고 했다.

그는 동생만 있던 나에게 언제나 유쾌하고 듬직한 형이 되어 주었고, 내가 만난 사람 중 술로도 빠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1박 2일 마셔도 취하면 마시는 속도만 줄었지 결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한 번은 대구 수성못에서 둘이 밤 늦도록 술을 마시고 집에 가니 오랜 병환 중이었던 그의 어머니가 운명을 달리해서 내가 몸 둘 바를 몰랐던 적도 있었다.
이후 어머니를 그리는 시(詩)를 카페에 종종 올려서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생긴 모습은 소도둑 같이 터프했지만 글과 바둑에 능하고, 인정이 넘치는 그는 자칭 ‘선비칼잡이’(바둑사이트 대화명)였다. ‘터프가이 젠틀맨’이라고도 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주로 내가 대구에 가서 만났지만, 문득 서울에 다녀가는 길이라며 내가 사는 청주에 들러 무심히 “너 보고 싶어 내려가다가 들렀다.”며 술을 사주고 가기도 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많은 일들을 어떻게 몇 줄 글로 다 옮길 수 있겠냐만,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 그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내가 평생교육을 만나고, 대학원 진학, 어쩌다 공무원이 되고, 새로운 환경과 업무에 매진하느라 바둑사이트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만남도 뜸해졌던 어느 날. 내가 대구에 가겠다고 했는데 몇 번을 가족여행을 핑계로 오지 말라고 했다. 가족여행은 왜 자꾸 연기가 되며, 가족여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평일에 가겠다고 했음에도 불편한 기색이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다짜고짜 내려가겠다고 했더니 그는 집이 아니라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그는 짙은 병색으로 임종만을 앞두고 가족과 함께 있었다. 불과 몇 달 전에 병을 알았고, 이미 늦은 상태였단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오열을 했다. 특별히 가깝게 지냈던 몇 분께 전화를 했다. 살아생전에 만날 수 있으면 만나는 게 좋겠다고. 그렇게 그를 보냈다.

두 아이들은 대학생이었는데 이제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경주와 서울에서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 가끔 연락을 주고받고, 출장길에 형수를 만나 저녁도 먹었다. 그 중 큰 아이가 지난달에 결혼을 했다. 나에게 주례를 부탁한다고 연락이 왔다. 아마 아빠의 향수가 나에게 가장 짙게 남았던 모양이다. 너의 부탁이라면 기꺼이 무엇이든 어떤 역할이든 한다고 했다. 주례 없이 덕담만 하기로 하고, 결혼식 전날 대구에 내려가 결혼할 신랑과 두 아이들을 만나 저녁을 먹었다. 워낙 반듯한 아이들이었던 만큼 신랑도 참 반듯해 보이는 젊은이를 골랐나 싶었다. 성혼선언문 낭독이 끝나고 덕담을 위해 단상에 올라가 신부를 보는 순간. 그의 얼굴이 오버랩 되면서 목소리가 흔들렸다. 신부도 눈물을 훔쳤다.

그를 만날 수 없지만 이제 아이들의 눈과 목소리로 그를 만난다. 아이들이 ‘아저씨’라고 나를 부르지만, 나를 통해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아빠의 모습을 찾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내 인생을 바꾼 사람은 세상에 없지만, 나에게 새로운 역할을 하나 남겨주고 간 형님.
영원히 당신을 잊지 못할 겁니다.
오래오래 아이들에게 ‘아저씨’가 되어 주겠습니다.